“욕? 우리들의 언어일 뿐이에요”
친밀감의 표현, 담긴 뜻 모른 채 변형·창작까지
인터넷 소설, 댓글, 게임, 영화 등 미디어 영향 커
인터넷 소설, 댓글, 게임, 영화 등 미디어 영향 커

대여섯 명의 여중생이 깔깔대며 떠드는 수다 내용이다. 듣기에도 민망한 욕설이 난무하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인 듯 보인다. 친한 친구를 부를 때 이름 대신 “이년아~”가 호칭을 대신한다.
예지(고1·가명)는 그건 욕이 아니라 친밀감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장난이니까 아무도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분 나쁘지도 않고요. 오히려 욕을 안 하면 간지럽다고 생각하죠. 욕 안 하는 애들을 천연기념물이라고 불러요.” 반 친구들 40명 중에 30명 이상은 ‘욕’이 섞인 ‘일상’ 언어를 쓰고 몇 명만이 ‘천연기념물’로 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해 파주 YMCA와 교하청소년문화의 집이 초·중·고교생 199명을 대상으로 ‘욕 사용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8%의 학생이 무의식중에 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욕을 듣고 화를 내는 학생은 초등학생 57.5%, 중학생 33.3%, 고등학생 15% 비율로 줄어들어 학년이 올라갈수록 욕설 사용이 일상화되고 있다.
욕은 품행이 불량한 특정 부류의 아이들만 사용하는 것이 아닌, 성별, 성적, 계층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아이들의 공통 언어가 됐다. 심지어 욕을 사용하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욕이 섞인 ‘그들의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애를 쓴다. 또래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아이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가족관계의 힘이 떨어지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또래집단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성인들에게는 단순한 욕일지라도 그 집단에서는 연대감을 위한 욕 이상의 것이라는 설명이다. 1388청소년지원단 이은조 상담팀장은 “또래 관계가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욕설에 대해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동조하는 경우도 있으며, 학교나 가정에서 잘잘못에 대한 통제가 바로 연결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중학교 1학년인 주민이는 욕하는 친구들이 멋있어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 “잘생긴 남자애가 욕을 할 때 멋있어요. 인터넷 소설에 나오는 폼생폼사 애들이 욕을 하면 봐 줄만 해요.” 예쁜 옷을 입은 친구를 보면 따라 입고 싶듯, ‘멋있어 보이는’ 욕 문화는 아이들의 모방 심리를 부추긴다.
일부 영화나 아이돌 스타의 노랫말 속에 있는 ‘멋있는’ 욕설을 아이들은 따라하고 싶어 욕설을 배우고자 하며, 욕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의 멋있음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엠창’ ‘호구빡빡이’ ‘찐찌버거(찐따, 찌질이, 버러지, 거지)’ ‘개졸려’‘정줄놓’ ‘여병추’ 등 청소년들이 흔히 사용하고 있는 욕설과 비속어는 여성 비하나 근친상간의 기존 욕설을 변형한 형태이거나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신조어들이다.
인터넷 채팅과 댓글, 게임, 인터넷 소설 등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청소년들이 욕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인터넷 소설의 경우 그 속에 나오는 욕설 문화에 대해 아이들은 자신들의 학교생활과 거의 유사하다고 말한다.
원호(15·가명)는 “게임하면서 못 보던 욕을 보면 배우기도 하고, 욕을 못 하면 비웃기도 한다”고 토로한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규제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추세다. 일부 교사들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의 언어생활에 호응하기도 한다. 박 모 교사(시흥시 소재 고등학교)는 “욕을 사용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야단치고, 수업시간에는 엄격하게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만, 아이들끼리 떠들면서 얘기하는 걸 일일이 다 지적하고 혼내기는 불가능하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장요한 국어학 박사(숭실대 강사)는 “욕설은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본인도 욕설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며 “언어와 사고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 의미 없이 내뱉은 욕이라 하더라도 그 언어생활은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청소년기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한다.
고등학교 3학년 초희(가명)는 “친구들이 욕을 욕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치기 어려운 것 같다”며 “욕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 고쳐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친구들이 일상적으로 욕을 사용하다가 갑자기 어른 앞에서 예의를 갖추려면 어색하고 뭔가 이상해 보인다”고 말해 청소년들의 언어 습관이 올바른 가치관과 예절 형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청소년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적극적인 대처가 가정과 학교, 정부 당국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기성세대의 올바른 언어 사용이 요구된다.
1074호 [사회] (2010-03-19)
김수희 / 여성신문 기자 (ksh@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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